본문 바로가기
흥미로운 지식들/인물 이야기

조선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이야기 3가지. 사실 마지막 공주는 덕혜옹주가 아니라 따로 존재한다.

by 히동동이 2023. 3. 7.
반응형

오늘은 일제 강점기 한일 합병으로 인해 멸망한 대한제국, 조선 마지막 공주라 불리는 '덕혜옹주'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2016년에 개봉해서 관객 약 550만 명을 끌어모은 영화, <덕혜옹주> 덕분에 사람들에게서 덕혜옹주의 인지도가 올라갔습니다. 포스터에서부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조선 마지막 공주,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는 덕혜옹주가 아니라 다른 인물입니다.

 

덕혜옹주-영화-포스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영화 포스터

 

📌 목차

1. 조선 마지막 공주는 '덕혜옹주'가 아니라 '영혜옹주'
2. 철종의 외동딸 '영혜옹주' 이야기
3. '덕혜옹주'와 남편 '소 다케유키'

  조선 마지막 공주는 '덕혜옹주'가 아니라 '영혜옹주'

 

영화 포스터와 다양한 대중매체로 인해 조선의 마지막 공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는 덕혜옹주라는 말이 사실인 것처럼 널리 퍼졌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따지면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덕혜옹주-어린시절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

 

덕혜옹주는 고종 황제의 딸이 맞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순종의 동생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그리고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독립 운동가인 '의친왕'이 덕혜옹주의 이복 오빠들입니다. 덕혜옹주의 어머니 양 씨는 궁녀였다가, 고종의 신임을 받아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되었습니다.

'공주'가 아니라 '옹주'라 불리는 이유는, 그녀가 후궁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정실부인(중전)의 딸만 '공주' 책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후궁의 딸에게는 '옹주'를 책봉합니다. 어쨌거나 덕혜옹주가 조선의 왕족이었고, 고종의 딸이었으며, 공주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혹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조선, 대한제국은 그보다 2년 전인 1910년에 멸망했습니다. 1876년에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맺고 처음으로 일본에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되었고, 1904년에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이 가져간다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었습니다. 1909년에는 조선의 사법권마저 일본에게 넘어간 '기유각서'를 체결했고, 마침내 1910년에는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유명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적 배경도 이쯤입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 구한말에 일어난 일을 다룬 드라마지요. 양반 여인 '고애신'과 미국 해병대 대위 '유진 초이'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로 유명한 드라마입니다. 아! 그 드라마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포스팅을 작성했는데, 관심이 있는 분은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미스터션샤인 고애신 명대사 "나란히 걷는다는 것이 참 좋소" 구한말 시대상과 실존인물 2명

오늘은 미스터션샤인 고애신이 유진 초이와 함께 걸으며 "나란히 걷는다는 것이 참 좋소."라고 말했던 장면에 대해서 포스팅해보려고 합니다. 단순히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유진 초이와 나란히

heedoee.tistory.com

 

 

📌 조선 말기, 대한제국의 역사와 덕혜옹주의 탄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876년: 강화도 조약 (최초의 불평등 조약)
  • 1894년: 갑오개혁 (신분제 폐지)
  • 1895년: 을미사변 (명성왕후 시해)
  • 1897년: 대한제국 선포
  • 1904년: 러일 전쟁과 한일의정서
  • 1905년: 을사조약 (외교권 박탈)
  •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 퇴위
  • 1909년: 기유각서 (사법권 박탈)
  • 1910년: 한일합병, 경술국치 (조선, 대한제국의 멸망)
  • 1912년: 덕혜옹주 탄생
  • 1919년: 고종 사망, 3.1 운동

 

따라서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엄밀히 따지면 마지막 공주, 황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왕실은 조금 더 유지되었던 모양입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왕실만 남아서 비록 허울뿐이지만, 덕혜가 태어난 뒤에도 '옹주'라는 직위에 책봉하면서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가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덕혜옹주는 상징적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 볼 수 있지만, 실제 시간 순서로 따졌을 때는  나라가 멸망한 뒤에 태어났으므로 마지막 황녀라 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1920년-덕혜옹주
1920년의 덕혜옹주

 

 


  철종의 외동딸, '영혜옹주'

 

영혜옹주-묘
영혜옹주 묘 옆에는 남편 박영효도 같이 묻혔다

 

그러면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바로 25대 왕 철종의 외동딸이었던 '영혜옹주'라는 분입니다. 아쉽게도 영혜옹주의 초상화나 사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영혜옹주는 1858년에 태어나 15살에 요절했습니다. 187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영혜옹주는 조선 25대 왕 철종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철종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다 갓난아기 때 죽었습니다. 오직 영혜옹주만 살아남았습니다. 궁녀였던 범 씨에게서 태어나, 9살 때 옹주로 책봉되었습니다. 더불어 범 씨는 옹주의 어머니, 즉 후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15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상당히 병약했던 모양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영혜옹주가 병약한 인물이었다고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철종의 정실부인(중전)이었던 철인왕후의 묘지문에서는, 철인왕후가 병약하고 여린 영혜옹주를 걱정하며,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고종에게는 덕혜옹주 말고도 다른 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딸들은 조선이 멸망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딸들이 조선의 마지막 공주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었다면 덕혜옹주의 언니가 됐을 그 딸들은 안타깝게도 갓난아기 때 모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아이들이 모두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태어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1900년도 조선의 평균 수명은 고작 35세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갓난아기가 요절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고종의 딸들은 너무 갓난아기였을 때 요절한 바람에, 옹주 책봉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의 딸이라면 당연히 공주 취급을 받겠지만, 실제로 책봉을 받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철종의 외동딸이었던 영혜옹주가 조선의 마지막 공주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덕혜옹주는 끝까지 살아남아 옹주 책봉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나라가 멸망한 뒤였으므로 역사적으로 마지막 공주라 보기는 어렵겠지요.

이해가 되셨나요? 정말 흥미롭지 않으신가요? 역사의 이런 부분들이 참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덕혜옹주'와 남편 '소 다케유키' 이야기

 

덕혜옹주-소다케유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덕혜옹주는 어렸을 때 정략결혼으로 일본의 장래 촉망했던 청년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조선 왕실의 명맥을 끊어버리겠다는 일본의 전략적인 행동으로,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내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고 해요. 어느 순간에는 조현병, 몽유병의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병세가 조금씩 심해지자 도저히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소 다케유키'였습니다. 일본은 전략적으로 덕혜옹주와 일본인을 결혼시키려고 했습니다. 조선 왕실의 순수한 혈통을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도 결혼이 조금은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다행히 결혼한 다음 해에 덕혜옹주는 학교를 졸업했고, 병세도 조금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는가? 에 대해서는 후대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정혜(마사에)'라는 딸이 태어났습니다.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는 딸을 키우는 데에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혜가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결혼을 하고 싶다며 부모님께 선언하던 해, 다케유키는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덕혜옹주와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그리고 조현병, 몽유병 증상이 악화된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합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1972년에 노년의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보기 위해 한국으로 왔지만, 덕혜옹주를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고 하네요. 과연 두 사람의 사랑은 진실이었는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 불리는 덕혜옹주는 1989년에 향년 76세로 영면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조선 마지막 공주,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에 대해 진실인지 아닌지 살펴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진짜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영혜옹주'가 더 정확하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해드렸습니다. 즐겁고 유익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덕혜옹주가 상징적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사실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분은 일제의 핍박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았잖아요. 일제강점기에도 꿋꿋이 지내고, 독립도 지켜보고, 한국전쟁도 지나고, 민주화 운동까지 지켜본, 역사의 산 증인이십니다. 시간 순서상으로 그분은 마지막 공주가 아닐진 몰라도,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 이외에도 저의 흥미롭고 유익한 역사 정보 포스팅을 공유해 드리며, 이상 글을 마칩니다.

📌 고려 무신 '소드마스터 척준경'에 대한 일화 4가지. 별무반 윤관과 도깨비 공유 김신

📌 조광조, 주초위왕이 새겨진 나뭇잎은 실화일까? 기묘사화 이야기와 주초위왕 실험 2가지.

📌 일제강점기 일본은 왜 숭례문을 철거하지 않았을까? 서울 남대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

📌 서울 을지로 충무로 지명 유래 2가지. 이순신과 을지문덕이 상징하는 의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