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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지식들/역사와 인문학

일제강점기 일본은 왜 숭례문을 철거하지 않았을까? 서울 남대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

by 히동동이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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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의 아픈 역사 일제강점기 시기에 왜 일본은 서울 남대문 숭례문과 동대문 흥인지문을 철거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조선에 관한 것이라면 모조리 탄압했습니다. 한국말도 못 쓰게 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심지어 광화문 앞에 떡하니 조선 총독부를 세워놓았습니다. 민족의 혼과 얼개가 있는 문화재는 모두 약탈하거나, 불태우거나, 파괴했습니다. 그렇게 사정없이 불태우고 파괴하던 일본이 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내버려 뒀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조선 왕조를 지키던 사대문이라면 상징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화재인데 말입니다.

 

서울-남대문-숭례문
서울 남대문 숭례문 (화재 전)

 

 


  서울 남대문 숭례문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구한말-숭례문
구한말 숭례문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빈번하게 침략했고,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2번 치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한말에는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침탈당했고, 일본 제국이 식민지화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짓뭉개버렸습니다. 겨우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했나 싶더니, 1950년에는 6.25 전쟁이 터지면서 온 국토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전쟁이 계속 터지면 사람들도 많이 다치거나 죽지만, 문화재도 소실되거나 파괴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남대문 숭례문과 동대문 흥인지문은 용케 살아남았습니다. 일본이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보호한 것일까요?

 


  숭례문은 일본 군대의 '개선문'이라서 살아남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성곽들은 모두 철거되기 시작했습니다. 숭례문 좌우의 성벽은 모조리 허물어졌습니다. 하지만 숭례문은 보존한 이유는 단지 귀중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게 있어서 우리의 숭례문은 '개선문'이었습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일본 군대는 부산 동래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한양까지 함락시키며 진군했습니다.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는 한양을 함락시키며 일본 군대를 이끌고 숭례문을 지나 경복궁으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가등청정'이라고도 불립니다. 한일 합병이 되고 난 이후로 일본은 꾸준히 도로 교통 개발 명목으로 남대문 숭례문을 철거하려는 논의를 했지만,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수도 한양을 함락하며 지나간 길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철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 정책 - 오타 히데하루)

 

가등청정-가토-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결국 숭례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귀중한 문화재여서도 아니고, 일본 제국주의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할 당시, 일본 군대가 조선의 수도를 함락시켰다는 역사를 상징하고 강조하기 위해 남겨둔 것에 불과했습니다. 동대문 흥인지문도 같은 맥락으로 철거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라는 일본 장수가 한양으로 진군할 때 흥인지문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철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침략자였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덕분에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보존될 수 있었다는, 그런 슬프고 아이러니한 역사입니다.

 

 


  숭례문이 겪은 수난의 역사들:  6.25 한국 전쟁

 

사회주의-스탈린
사회주의 스탈린

 

숭례문이 겪은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간신히 독립하고 광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쪽은 김일성을, 남쪽은 이승만을 필두로 한 두 개의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기습적으로 38선을 넘으면서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6.25 한국 전쟁의 발발이었습니다.

그때 서울은 순식간에 북한군에게 함락당했습니다. 이승만과 정부 인사들이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북한군들이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한강 대교를 붕괴시켜 버린 바람에 우리 국민들의 피해도 어마어마했습니다. 북한군에게 함락당한 당시에 숭례문에는 사회주의의 아버지 격인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내걸렸다고 합니다. 당시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념 대립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숭례문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린 사진 자료가 통제로 인해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북한 인민군, 남한군, 중공군, UN 연합군 등의 전투기들이 서울 상공을 오가며 미사일을 쏘고 융단 폭격을 가했음에도 숭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운이 정말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숭례문이 겪은 수난의 역사들: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

 

숭례문-화재-사건
2008년 숭례문 화재

 

2008년에는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통째로 전소되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대한민국의 국보 1호, 민족의 자긍심이었던 숭례문이 처참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방화범 채종기는 철학관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는데, 택지 개발로 인해 지급받은 보상금이 턱없이 적다는 이유로 정부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창경궁에 불을 지르다가 걸려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3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이후, 크게 불만을 가지고 2008년에는 숭례문에 방화를 저질렀습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에도 살아남았던 숭례문은 전대미문의 방화 사건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채종기는 이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2018년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방화 사건으로 숭례문이 우리 앞에서 자취를 감춘 지 어언 5년 3개월이 지난 2013년에 이르러서야 숭례문 복원 작업이 끝나고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습니다. 현재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숭례문은 2008년 이후 복원된 숭례문입니다.

 

 


  숭례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 '세로 현판'

 

숭례문-현판-세로
숭례문 현판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도 세로로 되어 있습니다. 세로로 된 현판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숭례문 현판만 세로로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한 '주술적 의미'입니다.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배산임수란 앞에는 물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곳이 명당이라는 뜻입니다. 왕이 있는 곳의 왼쪽에는 청룡이 있어야 하고, 오른쪽에는 백호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동대문 흥인지문은 좌청룡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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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학에 따르면, 과천에 있는 관악산은 '화기'가 많은 나쁜 산이라고 합니다. 관악산의 나쁜 기운이 북쪽으로 올라와 왕이 있는 경복궁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중간에 한강이 관악산의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고는 하지만, 확실하게 나쁜 기운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기운이 올라오는 길목인 남대문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만든 것입니다. '현판을 세로로 만들어서 나쁜 기운을 찍어 눌러버리겠다'라는 그런 주술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현재로서는 이 가설이 가장 유력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 외에도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누가 쓴 것인가, 누구의 필체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유력한 사람은 조선 3대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입니다. 수많은 고서와 문헌에서 숭례문 현판을 쓴 사람으로 양녕대군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작 그 양녕대군은 왕족 배경을 명분으로 권력을 과시하며, 온갖 유흥과 향락을 일삼다가 폐세자가 되었던 인물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결국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의 미움을 받아 폐세자가 되었고, 뒤이어 막내아들인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충녕대군이 바로 조선의 4대 왕, 세종입니다. 네, 지금 제가 이렇게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고 있는 이 문자를 창제한 그 장본인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서울 남대문 숭례문이 겪은 고초와 수난에 대한 역사를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풀어서 포스팅해 봤습니다. 부디 재미있고 유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숭례문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문화재입니다. 국보 1호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문화재를 숫자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라고 해서, 요즘은 국보 1호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저 '대한민국 국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문화재가 다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보는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보 숭례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국보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서울 숭례문_성곽전경 (촬영년도 : 2015년)

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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